v 임진왜란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십자군, 일본 기독교의 몰락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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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십자군, 일본 기독교의 몰락의 역사

5분 역사

by 이리니아 2020. 2. 1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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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4분의 1은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한국에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기독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세기 초반 이후이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도 유명한 카톨릭 교도였으며,

마포의 절두산 성지는 그들의 신앙의 유산이다.

 

그에 비해 일본 기독교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다. 

16세기 중반 프란시스코 사이에르로 대표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으며

큐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천주교인들도 꽤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도 그 중 한명이다.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시점이 16세기 중반이고 천주교의 확산을 두려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린 것이 16세기 후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 천주교의 확산 속도는 20세기 한국 개신교의 확산속도와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주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도로의 신분을 계속하여 유지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다이묘가 된 것이 16세기 후반임을 고려하면 히데요시도 묵인해 주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고니시의 영지였던 아마쿠사는 일본 천주교의 성지와 같은 나가사키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섬이라는 특징을 잘 살려서 고시니는 가족과 가신들을 모두 천주교도로 만들어 버린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바라보면 역사적으론 원수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수군에 비해 조선의 육군 전력은 형편없이 약했다. 

유성룡, 권율 등 문무에 뛰어난 가신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결정권자인 선조가 무능했던 관계로 조선의 육군은 일본 육군을 방어할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나마 백성들과 스님들이 싸우지 않았더라면 한양은 더 빠른시일 내 점령당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히데요시 군의 선봉을 맡은 인물이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사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가장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세키하가라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끝까지 조선 침략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니시가 댄 이유는 이유없이 이웃 국가를 침략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히데요시가 침략을 결정한 이후 고니시는 스스로 선봉에 서서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죄없는 이웃나라의 국민들을 살해하려 가는 군대치고는 특이한 복장을 갖춘다.

스페인 신부 3명을 군목으로 데려갔으며, (이는 조선의 첫 외국인 신부이다.)

그의 군기는 붉은 천에 그려진 하얀 십자가였으며,

휘하 병사들을 위해 매일 미사를 진행하였다. 

이런 일화들과 조선인 전쟁 고아들을 대거 입양해서 잘 키웠던 연유로 한국 기독교계에선 긍정적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양과 평양에선 정말 생각하기 싫은 학살을 저질렀다.

애초에 히데요시의 명령은 최대한 빠른속도로 한양을 점령해 선조를 잡는 것이었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바라볼때 왕이 도망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 점령은 전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은 달랐고,

선조는 매우 빠른 속도로 평양으로, 북쪽으로 도망갔다.

이순신의 수군이 아니었더라면 고시니와 가토는 두만강까지 쫒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수군이 조선군에 막히는 바람에 그들은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결국 평양을 점령해도 선조를 잡지 못하였고, 분노한 고니시는 한양의 모든 남자를 죽여버린다.

신자라고 보긴 어려운 행동이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는 조선에 밀서를 보내 평민들을 모두 대피시키기도 하였는데,

전국시대 일본의 무장다운 과격성과 신자로서의 양심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라 생각되는 부분이다. 

 

고니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기까지 히데요시와 명나라의 사이에서

전쟁의 종료를 위해 노력하였다.

실질적으로 전쟁의 끝은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고니시의 이러한 노력은 조선왕조실록과 일본 기록 양쪽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전쟁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며 고니시는 눈에 보이는 조선 고아들을 모두 일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천주교 신도로 만들어 양육하였다. 

그들 중 한명은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복자인 권 빈센트고 

얼마전 방문한 나가사키에서 그의 영정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일본으로 귀국한 고니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히데요시 밑에서 틈을 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격이었다.

도쿠가와의 동군의 반대편에서 중심 축이었던 고니시의 서군은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세키가하라에서 패배하게 된다.

 

다른 다이묘들과 같이 할복할 기회를 받은 고니시는 할복을 거부한다.

키리스탄(그리스도인)으로서 할복은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니시와 그 가족들은 할복도 못하는 겁쟁이라는 놀림과 수난을 당하며 글려다니다 참수당했다.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은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였다고 한다.

 

고니시의 패배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천주교 다이묘들은 서군이었기에

일본의 천주교는 성장한 속도만큼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탄압과는 비교도 안되는 도쿠가와 막부의 탄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본 천주교인들을 어떻게 탄압하였는지는 차후 작성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불과 50년도 버티지 못하고 일본의 기독교인은 씨가 마르게 된다.

 

영화 '사일런스'

 

그 이후 약 500년 동안,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기독교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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